서울과 테헤란의 영원한 약속, 그리고 잊혀진 시장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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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테헤란로’. 그리고 이란 수도 테헤란의 중심을 달리는 ‘서울로’.
두 도시는 1977년 서로의 이름을 가진 도로를 교환하며 영원한 우의를 약속했습니다.
그 배경에는 바로 골람레자 닉페이(Gholamreza Nikpey)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서울에 온 테헤란 시장, 닉페이
1977년 6월 27일, 닉페이는 당시 서울시장 구자춘과 만나 도로명 교환에 합의했습니다.
서울의 테헤란로와 테헤란의 서울로는 이때 탄생했죠.
닉페이는 단순한 외교 방문객이 아니라 이란 현대사에서 중요한 정치인이자 행정가였습니다.
- 테헤란대학교 법학 전공
- 런던정경대(LSE) 경제학 박사
- 국영 석유회사 근무, 주택부 장관, 이후 테헤란 시장


테헤란을 바꾼 행정가
닉페이는 1969년부터 1977년까지 테헤란 시장으로 일하며 도시를 크게 바꿨습니다.
- 도로·공원·인공호수 건설
- 교통·주차 문제 개선
- 홍수 등 재해 대비 체계 확립
- 장애아동 시설, 공공주택 등 사회적 약자 지원
- 도시 쓰레기 재활용 → 비료 생산 지원
그의 행정력은 1970년대 이란에서 ‘최고의 재건 프로젝트’로 평가받았을 정도입니다.

이슬람 혁명과 몰락
그러나 1979년 이란을 뒤흔든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은 닉페이의 운명을 바꿔놓았습니다.
새 정권은 그를 제국주의 협력, 교통 문제 미해결, 뇌물 수수 등 온갖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닉페이는 전문적인 논리로 자신을 방어했으나, 재판은 이미 각본대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국제엠네스티조차 그를 ‘정치적 희생양’으로 규정했죠.
결국 닉페이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했습니다.

남겨진 유산
그가 세운 니아바라 공원은 지금도 테헤란 시민의 쉼터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서울 테헤란로와 테헤란 서울로는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키며 두 도시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닉페이는 팔레비 왕조의 핵심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카자르 왕조 혈통과 연결된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유능한 행정력 덕분에 팔레비 체제에서도 요직을 맡았고, 결국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셈입니다.
서울 한복판 테헤란로를 걸을 때, 우리는 단순한 도로명 이상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 속에는 한 이란 정치인의 꿈, 도시를 바꿨던 업적, 그리고 역사에 휩쓸린 비극이 함께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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